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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bolon products | 2008/05/19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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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고난 반항아프랭크 설로웨이 지음, 정병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나의 점수 : 제 스무 번째 번역서 <타고난 반항아>가 출간되었습니다. 기뻐해 주세요. 원제는 Born to Rebel, '반항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1996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그 해 아마존 베스트셀러 35위에 랭크되었으며, <뉴욕 타임스>에 의해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띠지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구가 마음에 듭니다. "진화 심리학과 사회 과학의 경계를 허문 고전" 하드 백에, 금장이고, 분량이 872쪽으로 두께의 압박이 심합니다. 들고 다니면서 읽으려면 손목의 부담이 만만치 않겠지만 인테리어 소품으로 그만인 데다 주변의 미운 사람에게는 흉기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격이 무려 4만 원! (여러분이 한 권씩 사주시면 제 생계에 큰 보탬이 되겠네요.) 지난 주 주요 일간지에 두루 서평이 실렸습니다만, 바빠서 제대로 안 읽고 대충 쓴 언론사 기자들의 서평은 무시하시고, 제 선생님이기도 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연구원 전중환 박사의 다음 기사를 통해 이 책의 내용을 대강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 진보적 혁명은 늘 동생들의 몫이었다전하는 바로는 몇 주 후에 <TV, 책을 말하다>에서도 소개를 한다는군요. (이로써 스무 권 가운데 세 권이 위의 KBS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기염을 토하는군요.) 스무 권째 번역을 자축하는 의미로 '번역가' 정지영에 뒤이어 (번역가 주제에) 사인회를 하는 대한민국 제2호 번역가가 되어 보려고 합니다.(이 블로그는 준(semi)공식 뉴스메이커이므로 이 점을 명토박아 둡니다.) 속표지에 적어드릴 문구도 생각해 놨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에 백 페이지씩 했어요. ^^ 정지영 아니..... 정병선입니다. 2008년 블라블라..." 사인회를 성황리에 마친 후에는 저도 미모의 국제 변호사를 찾아보려구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 없습니다. 정히 받고 싶은 분은 덧글을 달아주세요. 정색하고,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지식의 대통합'--남들은 통섭이라고 하지만 제가 잘 몰라서--이라는 제 필생의 프로젝트와 관련해, 생물학과 사회과학을 매끄럽게 이어붙이는 도저하고 모험적인 시도라는 사실입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저는 각 방의 마감과 인테리어는 덜 끝났지만 외형과 골조는 완성되었다는 희망적인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설로웨이의 대담한 의도와 치밀한 방법론, 놀라운 결론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제는 '출생 순서, 가족 역학, 창조성'으로,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타고난 반항아는 누구일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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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bolon products | 2008/02/23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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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원 제: Late Victorian Holocausts 지은이: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 옮긴이: 정병선 체 제: 신국판 / 무선 / 644쪽
ISBN : 978-89-6157-007-7 93900
발행일: 2008년 2월 27일 값 23,000원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대량 기아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피할 수 있었던 정치적 비극이었다. 1898년 빅토리아 시대를 관찰한 유명한 대차대조표에서, 산업도시들의 슬럼 빈곤과 함께 인도와 중국의 기근 사태를 “이 세기가 기록한 가장 참혹한 실패”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1876년과 1899년의 기근 사태는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식민 모국의 관점에서 19세기 세계사를 쓴 현대의 역사가들은, 우리가 오늘날 “제3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을 삼켜 버린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초대형 한발과 기근 사태를 거의 예외 없이 무시해 왔다.그렇다면 빅토리아 시대의 본질을 밝혀 주는 결정적 사태가 증발해 버린 것인가? 우리가 이 참혹한 비밀의 역사를 시급히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빈민 대학살, 그 주범은 누구인가?│ 이삼 분 둘러보았을까, 나는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한 소녀의 시신을 물고 흔드는 개 두 마리를 발견했다. 시체는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따라서 그게 아이의 시신이라는 것도 전체 신장을 통해서나 겨우 파악할 수 있었다. 현지의 풍경과 냄새는 역겨웠고, 두 번째 시신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61쪽)
조사에 따르면, 1876년부터 1902년에 걸쳐 엘니뇨가 발생했을 당시 세 차례의 가뭄과 기근으로 최소 3천만 명에서 5천만 명의 식민지 빈민이 사망했다. 참혹한 가뭄과 기근 사태를 목격한 기록들을 보면 마치 거대한 괴물이 나일 강에서 황해에 이르는 지역을 유린하며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당시는 자유 경쟁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라 일컫는 때였다. 식민 모국의 관점에서 볼 때 제국의 영광을 밝혀 주던 19세기의 마지막 불꽃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관점에서 보면 거대한 화장용 장작더미가 내뿜는 소름끼치는 불빛에 지나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끔찍하게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경제사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상당히 모순되는 방식으로 이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데이비스는 이 책에서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가뭄 기근을 흔히 자연재해라고 치부해 버리는 기존의 역사 서술에 도전한다.
│‘보이지 않는 손’에 생존을 맡기다│
흉작도 원인의 일부지만 철도로 기근 지역에 원조 물자를 보내는 게 가능해진 뒤였다. 문제는 엄청나게 치솟아 버린 가격 때문에 곡물을 살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전에는 소규모 가게들이 흉작에 대처하는 방편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가게들이 사라지거나 대규모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독점 자본가들이 사실상 상황을 장악했다. 곡물의 자유로운 유통은 그들 손아귀에 있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 체계 아래 인도인 수백만 명이 죽었다.(33쪽)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가뭄 기근으로 인류사 최악의 흉작과 물 부족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빈민을 구제할 잉여 곡물은 언제나 국가와 제국의 다른 곳에 넘쳐났다. 가뭄 피해자들을 구조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국주의는 새로운 상품 시장과 가격 투기를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끔찍한 기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스미스주의적 신조와 냉혹한 제국주의적 사리사욕으로 곡물이 대규모로 유출되면서, 이들을 살릴 수 있는 실낱 같은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국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그들의 야만적인 신 앞에서 구호 활동을 포기했고, 궁핍해진 빈민들은 엘니뇨의 파괴적인 위력 앞에 아무런 보호책도 없이 내던져졌다.
│데이비스의 관점에서 본 동학농민운동│
조선에서 절호의 기회를 붙잡은 열강은 일본이었다. 북중국의 가뭄이 유사한 양상 속에서 조선의 곡창이었던 전라도로 뻗어 나갔다. 이 은둔의 왕국을 착취하려던 일본에게 가뭄은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은 열도의 쌀을 가져가라고 전했다. 조선은 쌀을 되갚을 능력이 없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언했다. 그러나 10년이 채 안돼 조선은 가뭄 속에서도 일본에 쌀을 수출해야 했다. 결국 전라도의 굶주린 농민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 사태에 혁명적 불만을 토로한다. (152쪽)
데이비스는 빅토리아 후기의 전 세계적 경제 변동과 기후 변화를 통해 동시대 조선의 상황도 재조명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고 실학의 대두로 평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 방식이다. 그러나 데이비스에 따르면, 동학 역시 전 세계 농업 인구가 신제국주의 질서에 순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고자 벌였던 전쟁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세포이항쟁, 의화단운동, 브라질의 카누두스 전쟁처럼 생존 및 환경 위기에서 생존권을 놓고 벌이는 기근 저항운동인 것이다. 제국주의는 종말론에 가까운 잔인함을 드러내며 이 천년 운동들을 철저하게 진압했다.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문화사나 미시사에 치중하거나 한일 관계에 초점을 둔 측면이 크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전 세계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역사를 되돌아 볼 기회를 제공한다.
│제국주의 시대, 엘니뇨는 어떤 역할을 했나?│
가뭄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은 19세기 과학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였다. 1960년대 후반에야 비로소 태평양 적도대가 무역풍과 짝을 이뤄 작동하면서, 열대 지방 전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온대 위도대의 강수 양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적 돌파구가 열렸다. “엘니뇨 남방 진동(El Niño-Southern Oscillation, 간단히 줄여서 엔소ENSO)”이라고 부르는 열대 동태평양 지역의 급속한 가온 현상이, 계절에 따라 기단과 대양 온도 사이의 광대한 시소 현상으로 변동하면서 동시적인 가뭄 기근, 홍수를 불러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취합된 엘니뇨 사태에 따른 믿을 만한 기록을 통해 엔소가 어지럽게 남겨 놓은 지문들을 확인할 수 있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기근은, 그 기근을 발생시킨 각종 사회경제적 요소들의 온상이자 가속기였다. 엘니뇨는 그 기근을 확대 강화했으며, 제국주의의 방임 아래 사람들의 생존을 지속 가능하도록 보장했던 생태적 기반을 극심하게 파괴했다.
│근대적 빈곤이 탄생하다│
세계 각국의 전통사회는 가뭄과 기근을 방어할 수 있는 고유의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공유자원과 사회적 안전망, 지역 우물과 관개 수로 등을 통해 적극적인 기근 방어 활동을 펼쳤고, 1740년대의 중국처럼 어떤 유럽 사회도 이루지 못했던 구호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위대했던 농경 사회들이 세계경제에 통합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유 시장경제로 전환된 생존의 뒤틀린 논리, 식민지 세입 양도의 결과, 금본위제를 제정하면서 일어난 충격, 재래식 관개시설의 파괴 등.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농민이 떠맡아야 했던 기여는 필수적이었다. 생산양식의 제국주의적 변형은 기후 요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양상을 극단적으로 바꿔 기근 취약성을 형성했다. 이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제3세계”라고 부르는 지역이자 상태를 탄생시킨 “발전 격차”, 즉 불균등한 수입과 부에서 기인하는 “근대적 빈곤”이 탄생했다. 이 격차는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조성되었고 국가간 불평등이 계급 불평등만큼이나 깊어졌다.
• 지은이 ― 마이크 데이비스
사회 비평가, 도시 이론가, 역사학자 겸 정치 활동가다. 고향 캘리포니아 남부의 사회 계급과 권력관계에 관한 연구 업적으로 명성이 드높다. 그 연구 성과가 「수정水晶의 도시」로 출간되었다.현재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뉴레프트 리뷰」의 편집자이자 「소셜리스트 리뷰」의 정기 기고자다. 스스로 ‘국제 사회주의자’이자 ‘맑스-환경주의자’임을 천명했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86),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조류독감-전염병의 사회적 생산」(돌베개, 2008), 「수정水晶의 도시」(1990), 「차량 폭탄 테러의 역사」(2007), 「제국을 폭로하는 에세이」(2007), 「미국-멕시코 국경의 인종주의와 국가 폭력에 맞서는 투쟁」(2006) 등의 저서가 있다.
• 옮긴이 ― 정병선
연세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브레인 스토리」, 「렘브란트와 혁명」, 「존 리드 평전」,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 「거짓 나침반」, 「조류 독감-전염병의 사회적 생산」, 「노화와 질병」, 「전쟁의 얼굴」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감사의 말 9 사용한 용어와 정의 11
서문 ❚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 21 괴물이 거대한 지역을 유린하다 23 19세기, 증발해 버린 비밀의 역사 28 굶주림의 노예들 36
1부 대한발, 비극의 서막 1876년~1878년
1장 ❚ 빅토리아의 유령 49 인도의 네로 황제 53 죄수보다 적게 받는 노임 60 구호 사업을 거부하라 70 올림포스에서 내려오다 78 다중 살인의 공범 83 기근과 민족주의 89
2장 ❚ 빈민은 그들의 집을 먹는다 105 1. 중국 108 만인묘 110 말로 다할 수 없는 산시성의 비극 119 2. 브라질 130 재앙을 당한 사람들 133 해안 지역으로의 대탈출 138
3장 ❚ 전쟁과 신앙, 엘니뇨를 뒤따르다 151 아프리카의 가뭄과 제국주의 기획 164 북아프리카의 노천 무덤 170 전 세계의 사망자 통계 178
2부 엘니뇨와 새로운 제국주의 1888년~1902년
4장 ❚ 지옥의 정부 195 새로운 경작지에서 가뭄이 발생하다 198 비참한 나날의 에티오피아 207 기근에 궤멸된 마흐디스트 215 세기말의 묵시록 223
5장 ❚ 해골들의 축제 233 정부 납골당 236 어린이들의 고통 248 청명한 하늘의 기근 257 진정으로 제국주의적인 총독 262 소름끼치는 기근 노래 269 구자라트의 지옥 273
6장 ❚ 천년 왕국을 갈구하다 289 중국, 교회가 하늘을 밀봉하다 291 브라질, 심판의 날을 맞이하다 304 기타 식민지 아시아, 빠져나올 수 없는 덫 315 아프리카, 유럽인들이 메뚜기를 보내다 322 20세기까지 미친 여파 330
3부 엔소, 잡히지 않는 흰고래의 정체
7장 ❚ 계절풍의 수수께끼 345 제국의 과학 349 흑점 대 사회주의자 353 지정학과 남방 진동 360 비야크네스와 엔소 패러다임 368 수십 년을 단위로 하는 일정한 유형? 374
8장 ❚ 굶주림을 부르는 기후 387 원격 연계와 인과관계 388 엔소의 지역적 기후학 395 인도·중국·동남아시아·호주와 오세아니아·남아메리카·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남부·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동부·사헬과 마그레브·유럽 엘니뇨 연대기 430
4부 기근의 정치 생태학
9장 ❚ 제3세계의 탄생 451 나쁜 기후 대 나쁜 제도 452 가죽의 법칙 대 철의 법칙 459 취약성에 대한 관점 464 패배의 늪에 빠진 아시아 469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세계경제 476 군국주의와 금본위제 483 맬서스주의의 신화 488 관개 부족 사태 493
10장 ❚ 인도, 빈곤의 현대화 505 목화, 비참한 꽃을 피우다 507 넘쳐 나는 밀 속에서 굶주리는 사람들 513 착취자들의 우두머리, 식민 국가 521 조각난 공유 자원 525 토착 관개시설의 붕괴 533
11장 ❚ 중국의 직무 유기 553 목숨을 사고팔다 557 바닥을 드러낸 곡물 창고 566 부패, 쇠퇴를 향한 지름길 573 황금시대의 부패 청산 577 불모지로 변한 북중국 581 하천 관리의 위기 588 수문학적 통제를 포기하다 595
12장 ❚ 브라질, 노르데스테의 인종과 자본 607 비공식 식민주의와 국가의 능력 608 인종 차별과 퇴보하는 경제 613 생태계의 붕괴 617 목화 호경기의 그늘 623 구경거리에 불과한 관개 사업 628
옮긴이 후기-‘자연재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635 찾아보기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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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bolon products | 2008/01/0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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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류 독감 옮긴이 후기
이 작은 책은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2005년에 출간한 The Monster at Our Door: The Global Threat of Avian Flu를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조류독감에 대한 경각심 속에서 책을 집어든 분이라면 이 치명적인 질병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답을 알려드리겠다. 스트레스를 피하고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 인체 자체의 질병 저항력을 최대한 끌어올려라. 그리고 (백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고, 그 전망도 요원하므로) 타미플루(Tamiflu)를 구입해두도록 한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수백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대유행병에 맞서는 세계 유일의 초기 방어 수단은 타미플루뿐이다. 살아 있는 조류와 빈번하게 접촉하거나 가금류 산업 및 독감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의료계 종사자들이라면 더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이게 다다. 너무 막연하지 않느냐고? 그 간단치 않은 사정이 이 책에 자세히 실려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대해 잘 모른다. 인플루엔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복잡한 진화 체계를 갖고 있다. 『네이처』는 2004년 7월 조류독감을 사실상 근절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H5N1은 이제 아시아 가금류의 풍토병으로 자리를 잡았다. 놈은 확고한 생태적 지위를 구축했고, 이를 발판으로 장기간에 걸쳐 인류에 대유행병의 위협을 가할 것이다.” 현재 세계 최고의 인플루엔자 전문가들은 조류독감이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고 섣불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라는 냉정한 결론에 도달해 있다.
한국에서도 2006~07년 겨울에 조류독감이 빈발했다.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고, 그에 따른 피로 현상도 분명 감지된다. 그러나 이 책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플루엔자의 생태학을 안다면 이런 누적적 상황이 최후의 불길한 사태를 향해 초침을 째깍이며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3월에는 북한에서도 고병원성 H7 변종이 발견되었다. H5의 치명성과 H7의 전염성으로 무장한 최후 심판의 재조합형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8년 동안 H5N1을 연구한 홍콩의 과학자 켄 쇼트리지는 이 교활한 다윈주의의 작은 악마가 환경 파괴, 다시 말해 종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조류 인플루엔자의 경우는 지방적인 사건이 언제나 세계적인 사태가 된다.
세계보건기구는 최악의 경우 5,000만 명이 사망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형 Z가 현재 보이는 치명성을 바탕으로 외삽법을 적용하면 정말 최악의 경우 사망자가 10억 명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미 홍콩, 중국의 광둥성,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미국의 캘리포니아, 네덜란드의 헬데를란트, 타이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닭이 몇 억마리씩 도살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선데이 헤럴드』는 대유행병이 발생하면 사회가 와해 직전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 영국 정부의 한 보고서를 게재했다. “전체 국민의 최소 25%가 6~8주 만에 병에 걸릴 것이다. …… 사망자도 아주 많이 발생할 것이다. 전체 인구의 1%가량으로 추정된다.”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제3세계의 도시들은 대유행병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많은 공중 보건 전문가들이 염려하는 선례가 1994년 9월에 발생했다. 인도의 수라트에서 범유행성 폐렴이 발병했던 것이다. 돌연한 공포가 즉각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적으로 영업 행위를 하던 의사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도주했다. 항생제 사재기가 만연했고, 정부는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 군대가 동원되어 빈민을 격리했다. 세계보건구는 침묵했다. 다른 국가들은 감염국에 오명을 씌우고 낙인을 찍어버렸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유행병, 슬럼의 빈곤, 신자유주의 정책이 맺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에 대한 공포를 확인할 수 있다. 범유행성 인플루엔자가 발생하면 수라트의 경험이 아마도 100배는 확대 증폭될 것이다. 한미 FTA 협정도 대중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다. 바로 조류독감부터 말이다.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악몽을 확인했다면 정치인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라는 요구 행동에 나서야 한다.
1976년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은 인간과 병원균의 공진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화가 세 차례 있었다고 주장했다. 신석기 (농촌-도시) 혁명, 고대 유라시아 세계의 탄생, 16세기 근대 세계 체제의 형성이 그 세 사건이라는 것이다. 각각의 변화는 인간 집단이 생물학적으로 재통합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와 관련해서 미생물 기생체들도 상호 교환되는 무대였다. 일부 전염병학자들은 이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네 번째 변화, 다시 말해 인간과 병원균 사이의 관계를 재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목축(牧畜), 그러니까 가축을 그저 단순히 기르는 수준에서 축산(畜産), 다시 말해 가축을 산업적으로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동물 사육이 전통적 농업보다 화학 약품 제조에 더 가까운 산업화된 능률적 공정으로 변모한 것이다. 축산업과 인간 집단의 상호 작용은 복잡하고 동태적이다. 실제로 우리는 아직까지도 인간과 닭을 포함한 가축 사이의 다양한 접촉 유형과 연계된 위험 요소들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로버트 웹스터가 주장해온 것처럼 인간과 동물의 접촉에 대한 포괄적인 점검과 관찰, 감시가 필요한 이유이다.
새로운 인플루엔자 아형들이 종 사이를 오가며 가속적으로 진화하고 녀석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데서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지구적 차원의 두 가지 변화는 1980~90년대의 축산업 혁명(대규모 농업 자본주의가 농업을 세계적 차원에서 정복해가는 과정의 일부)과 중국 남부(인간 인플루엔자의 역사상의 도가니)의 산업 혁명이었다. 후자의 과정에서 이 지역의 물자와 인간이 나머지 세계와 교통하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제3세계의 거대 도시와 그에 부속된 슬럼의 탄생은 세 번째의 지구적 조건을 만들어 냈다. 거대 도시와 슬럼은 대유행병이 퍼지면서 병독성이 발달할 수 있는 인간 매개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태를 매우 폭넓게 이해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해 대처해야만 한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역사에 기후 현상과 병리학을 포섭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각각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될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이후)는 이런 작업의 일부이다. 이 긴급하고도 놀라운 책에서 마이크 데이비스는 준비되고 있는 바이러스 묵시록의 과학사와 정치 과정을 설명한다. 아울러 그는 질병을 예방하는 단순한 조치를 뛰어넘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밝힌다.
2007년 12월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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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와 브루노 | 2007/08/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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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생계 유지 수단으로 삼은 지 4~5년 된다.
그 동안 내 이름을 달고 공개 출판된 책이 17권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기타 잡물들과 보조 번역 등등을 포함하면 원고지 10만 매가 넘을 것이다(2년 전 계산이었다).
과분한 칭찬도 들어보았고, 부끄러운 실수도 종종 했다.
매너리즘에 빠지는 듯도 하지만, 아무튼 텍스트를 상대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 했고,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번역 원고를 하나 기고하던 곳에서 품질이 시원치 않다며 '짜르겠다'는 통보를 최근에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나름으로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던히 노력했으므로.
<실비와 브루노, 놀라운 발견>에서 썼던 것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나 지식 한 줄이라도 (해당 언어 공동체에) 보태고 전달해줄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자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글을 남겨두는 이유는, 새로 번역을 맡게 되실 분이 저간의 사정을 아시는 게 혹시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다.
나 자신이야 아쉽지만, 새로 맡게 되는 분이 마무리를 잘 지어주셨으면 싶다.
약 40만 원 정도를 원고료로 받았다. 생계에 보탬을 주신 것에 대해 월간지 측에도 감사한다.
연재 덕택에 단행본 출판에 관심을 보인 분까지 계셨다.
계약이 구체적으로 성사된다면 독립적으로 이 작업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퍼블릭 도메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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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와 브루노 | 2007/06/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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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발, 아침 6시에 일어났는데, 메일 한 개 쓰고 나니까 12시 44분이다. 젠장! 잡지에 소설 작품을 하나 번역해서 싣고 있는데 편집자가 번역이 시원치 않다고 성화다. 그래서 길게 변명하는 게 그 내용이다. 문제의 작품은 루이스 캐럴의 <실비와 브루노>인데, 아무튼 이 과정을 밝히 적어놓아야겠기에 여기에 두 메일을 공개한다.
먼저 편집자가 보낸 내용
안녕하세요, 정병선님. 잘 지내셨는지요? 2호 잘 배달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지금 3호 막판 작업이 한창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실비와 브루노 2장 교정교열 보았는데,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선 의미가 다소 다르게 번역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의 소망과 관련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베일이 너무 두꺼워서 반짝이는 눈의 광채와 사랑스런 타원형 얼굴의 흐린 윤곽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불행하게도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일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텔레파시 실험을 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군! 그녀의 얼굴을 #생각해낼# 거야. 그리고 그 초상을 실제 얼굴과 비교 검증해봐야지.” --> 이 부분은 원문을 보니, 사랑스러운 얼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안타깝게도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일 수도 있다고 따로 떼서 써야 할 문장인 듯 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는 (혹은 정확하게 뜻이 다가오지 않는) 표현들이 좀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처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사방팔방으로 ‘마음을 잰 걸음으로 움직여’ 보았지만 말이다. 분명 아에네아스라도 그 방법을 샘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명명하게 보이는 달걀 모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수학의 도해처럼 코나 입 구실을 할 만한 초점조차 없는 단순한 타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고를 집중하면 #그 베일을 제거할 수 있고# 희미하게나마 신비로운 얼굴을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서히 들었다. “그녀가 예쁠까?” 아니면 “못 생겼을까?” 하는 두 가지 의문점은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보류했다. --> 수학의 도해처럼... 이 문장은 초점 두 개도 안 찍고 작도해놓은 타원 같다는 뜻인 듯 한데, 의미가 확실하게 읽히자 않습니다. 그리고 조화로운 균형... 도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표현 같습니다. *아래 줄친 문장들은 번역투(소위 말하는, 직역한 듯한 문장)라는 느낌입니다. 성공은 부분적이었고 변덕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 가끔씩 갑작스럽게 빛이 명멸하면서 베일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그 얼굴을 온전하게 파악하기 전에 모든 게 다시 어두워졌다. 매번의 섬광 속에서 얼굴은 더욱 더 어린애다워졌고 순진무구해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그 베일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실비의 얼굴이었다! “여자답지 않게 꽤 심오한 질문을 하는군!” 나는 혼잣말을 했다. 남성 특유의 자만심 속에서 여성의 지력은 기본적으로 피상적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나는 1분 정도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당신이 #살아 있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또렷하게 말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래 대목의 경우, '과학 지식'과 '인간 정신'(대문자로 쓰여있죠)이 명확하게 대립하는 의미인 만큼 번역어를 하나로 정해주시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글로 쓰인# 과학 내용 중에 산 사람이 아직까지 #읽어보지# 못한 게 아주 많기 때문이죠. 그리고 #여러 모로 깊이 생각된# 과학 내용 가운데서도 #씌어지지# 않은 것이 아주 많지요. 그러나 당신이 모든 인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나는 #사람들의 정신#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한 번쯤은 떠올랐던 것이니까요.” 음, 소설은 (동화적인 느낌을 주건 주지않던 간에) 일단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을 줘서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특히 잡지니까 더욱). 물론 '실비와 브루노'같은 텍스트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문턱을 낮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루이스 캐럴의 유머러스한 느낌이 좀더 살아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치광이 과학자 냄새를 폴폴 풍기는 교수의 휴대용 목욕자루 발명의 경우,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듯 하고 있는데... 목욕만 하더라도 plunge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으니 자루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는 느낌을 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다이빙-목욕이라고 고쳤습니다만. 전신욕은 몸을 그냥 다 담근다는 의미니까,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당신은 정말로 매일 아침 전신욕을 했습니까?” 속왕이 물었다. 교수와의 대화를 재개하려는 것 같았다. “길가의 작은 여인숙에서도 말이에요?” “물론이죠, 당연합니다!” 교수는 명랑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제가 설명해드리죠. 이건 사실 아주 간단한 유체역학 문제입니다. (유체역학은 물과 힘의 조합을 의미한다.) -->어원상 뜻이 유체와 역학이니까 그냥 바로 유체역학은 유체와 역학의 조합을 의미한다는 우스운 말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대목의 경우, 자루에 뛰어들어서 어떻게 나온다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전개하는 대목인데...욕조 안에 들어가서,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물구나무 서기 자세 그대로 몸을 위로 밀면, 자루 밖으로 몸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번역으로 잘 표현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교수가 말했다. “전체 아이디어 가운데서 가장 멋진 부분이 바로 그거에요. 휴대용 욕조의 내부에는 엄지손가락이 이동할 수 있는 고리 모양의 환상선이 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같은 것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어쩌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어요. 따라서 활동적인 여행자가 가죽부대 밖으로 빠져나올 때쯤이면 머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체 부위가 한쪽으로 넘어지리라고 확신할 수 있죠. 중력의 법칙이 #그것을# 가능케 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바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죠!” *각주는, 이미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를테면 아래 대목처럼 루이스 캐럴이 단어 가지고 말장난하듯 공간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compartment가지고 아침 먹는 식당에서 객실로 공간을 확 바꾸어 버리고, 객실에서 레이디와 대화를 나누다가 우구그가 나타나면서 다시 실비와 브루노가 있던 공간으로 가니까... 그는 필요 이상의 공손한 태도로(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내가 탄 객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사랑스런 젊은 아가씨!” 나는 조금은 쓰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이것은 제1권의 서막이야. #그녀는# 여자 주인공이고. #나는# 그녀의 운명을 진전시키는 데 필요할 때만 등장하고, 마지막에도 교회 밖에서 대기했다가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는 조연 가운데 한 명이로군.” “예, 아가씨, 요정의 나라에서 갈아타세요.” 내가 들은 다음 말은 이것이었다. (어쩜 이렇게 알랑거릴 수가 있을까!) “ “그렇다면 기다려 봤자네요!” 귀부인이 말했다. “자, 앉자, 어거그(Uggug). 내 새끼, 와서 옆에 앉도록 해라!” “#내# 옆이 아니라면 아무데라도 상관없어!” 속왕이 투덜거렸다. “이 녀석은 항상 커피를 엎지른단 말이야!”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3장 번역을 한번 더 퇴고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사실 제가 이 작업을 일일이 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번역해주시는 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번역하기 전에 텍스트에 대해서 먼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작업을 진행하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독자들이 읽는데 다소 힘들기도 하고 캐럴의 재미를 느끼게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좀 걱정스럽습니다. 물론 원래 쉬운 텍스트가 아니니 포기할 부분이 있기도 하겠지만, .. 적어도 소설적인 문장으로 구성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2장 교열본을 첨부합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김은미 드림
그리고 다음은 내가 구질구질하게 답변한 내용
소설의 이해 방식 및 전체적인 진행 문제와 관련해 아쉬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업무의 부하가 많다는 점은 대충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는 좁은 범위와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뒷부분을 아예 읽지도 못했고--이 점은 은미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따라서 전체적인 시각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실비와 브루노>를 "미지의 어린 독자를 상정하고 이해하기 쉽게 얘기를 들려주는 듯한 대화체"의 적용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앨리스와 루이스 캐럴에 관한 국내 박사 학위 연구자 양윤정 씨는 <실비와 브루노>가 보다 심각한 작품이라고 인정합니다.
최근에 제가 읽고 정리해둔 페이지를 하나 붙여드릴께요.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http://sumbolon.egloos.com/3229774)
하지만 1장은 이미 그렇게 나갔고, 저는 편집부가 발휘할 수 있는 기동의 여지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렇게 번역해드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작품 전체를 복사하든지 제본해서 보내주세요. 각론을 얘기하기 전에 '우구그'라고 하셨는데, 어거그가 좋을 것 같습니다. 어글리 피그의 '어거그'(말놀이)니까요.
첫 부분의 난제는 갑자기 장면이 바뀌는 것입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당황할 수밖에 없는데, 기차 여행 장면으로의 전환을 명백하게 알려주는 단어가 몇 개뿐이기 때문입니다.
compartment, change, guard, next station, engine, 그러다가 train이 나오고 gigantic monster, circulation, speeding이 나오면서 명확해집니다.
그러나 이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텍스트만 볼 때 얘기고, 영상을 떠올린다면 compartment는 당연히 객실이 되어야 하지요. 왜 '구역'이라고 하시나요?
또, 각주 1번에서 "무대를 식당에서 기차 공간으로 바꾸어 버린다"고 쓰셨는데, 식당에는 아직 가지 않았고, 식당으로 가는 과정에 기차를 타는 사건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메일에서 처음 제기하신 내용이 오역 부분입니다.
저는 그 부분이 왜 오역이라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번역한 내용을 봅시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의 소망과 관련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 전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베일이 너무 두꺼워서 반짝이는 눈의 광채와 사랑스런 타원형 얼굴의 흐린 윤곽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불행하게도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일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텔레파시 실험을 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로군! 그녀의 얼굴을 #생각해낼# 거야. 그리고 그 초상을 실제 얼굴과 비교 검증해봐야지."
이제 은미 씨가 고친 부분을 보도록 하자구요.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어. 그러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녀의 얼굴이 온통 베일에 싸여 있었거든. 게다가 그 베일이 어찌나 두껍던지, 반짝이는 눈과 얼굴의 흐릿한 윤곽밖에 볼 수 없었단다. 그건 사랑스러운 타원형 얼굴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안타깝게도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일 수도 있지. 나는 다시 두 눈을 감고 혼잣말을 했지. "텔레파시3) 실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그녀의 얼굴을 #맞춰볼# 테다. 그리고 그 초상을 실제 얼굴과 비교 검증해봐야지."
은미씨는 문장을 수학적으로 재단하시면서 오역이라고 지적하셨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도 그렇고, 분명히 캐럴의 문장쓰기(의식 구조)도 그렇다고 짐작할 수 있는 바, 앞 문단의 "완벽한 코로군"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이미 사랑스런 얼굴을 희망적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덧붙여 썼다고 할 수 있지요. 두 예시문을 비교해봐도 저는 그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수고스런 교열 과정에서 은미 씨가 제 번역이 엉터리라는 혐의와 심증을 굳혀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방급 언급한 문단의 앞 문단을 보면 확실히 저의 게으름이 나타나기는 합니다. 괄호 부분 말이지요.
이런 것 말이에요.
엔진의 단조로운 진동음(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바퀴의 바로 그 회전 때문에 마치 기차가 어떤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지는)
저는 이런 지적과 함께 읽기 좋고 어쩌면 바르기까지 한 교열 표현에는 항상 감사하고, 또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만 말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내밀한 제 정황을 토로하자면, 제가 영어 실력이 썩 좋지 않아서 "왠만하면 직역하자, 나아가 축자적으로까지 번역하자"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은 부분적이고 변덕스러웠다"라고 번역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더 자연스런 한국어식 표현으로 나아가는 일에 서툽니다. 하물며 발행 당시 아이들에게 외면당했고, 전문 연구자들에 의하면 "청소년 이상, 성인을 상대로 한 보다 심각한 작품"이라는 책의 전체 윤곽도 모르는데 애들 용으로 "작은 성과도 있었지만 그 추측이 맞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지 판단도 안 선다는 말입니다.
메일에서 제기하신 이하의 문제 제기에도 일반으로 이렇게 답합니다.
"마치 수학의 도해처럼 코나 입 구실을 할 만한 초점조차 없는 단순한 타원이었던 것이다."
저는 이 문장을 영어로 접하면서 diagram이란 단어를 통해 집합론의 벤다이어그램을 떠올렸습니다. 수학의 정석에서, 아니 중고교 수학 과정에서 배웠을 테니 독자들은 모를 거라고 애 취급하지 마세요.
하지만 칸토어의 집합론은 19세기 말에 확립되었습니다. 캐럴이 수학자였으니 집합론의 초기 발달 상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집합론의 '벤'다이어그램이라고 옮기지 않고 수학의 도해라고 옮겼습니다. mathematical diagram이잖아요. 도해는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다는 뜻이니 여기에 무슨 해설을 덧붙이겠습니까?
더구나 캐럴은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 발전상에 대체로 공감하고 수학자나 과학자의 면모를 보이는 문장들을 많이 씁니다(이장의 전신욕 얘기나 최소공배수와 도서관 얘기).
같은 문단에서 "코나 입 구실을 할 만한 초점조차 없는 단순한 타원"이라면서 수학자 티를 내고 있잖아요.
뒷 부분은 내버려두면서 "수학의 도해"를 잘 모르겠다는 건 우습지 않나요?
이외에도 캐럴은 Telepathy라는 말을, 그것도 대문자로 씁니다. 텔레파시라는 말이 적힌 같은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test the portrait with the original입니다. 실제 얼굴과 추측해낸 초상을 비교해본다는 얘기인데, portrait 나 original은 뭘로 옮겨도 상관없지만 저는 test를 "어색하게도" '비교 검증'이라고 옮겼습니다. 곳곳에서 과학자 티를 내고 있거든요. 왜 compare 같은 단어를 안 썼겠습니까?
이런 연유로 저는 은미씨가 제 능력을 대체로 불신하면서 문장을 마구 "폭력적으로" 고치시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편집부의 기동의 여지를 존중합니다. 마음껏 고치세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질 준비도 하시고요. 물론 책임을 진다는 게 별 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쓰는 이 메일처럼 나름의 이유 속에서 그렇게 한 행위의 근거를 분명히 밝혀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공개할 준비를 하자는 것이지요. 근데 이쯤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는 텍스트를 다 읽어본 사람이 한국에 한 놈(년도 포함해서)도 없다는 것 아닙니까?
또, 저는 염려도 있지만 제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교열을 통해 더 나아진 데 대해서는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캐럴 자신이 쓴 원문 자체의 흐리마리함(이 메일의 마지막에 나오는데, 은미씨도 바르게 이해했느지 까리하고 저도 까리한 욕조에서 튀어나오는 부분)도 지적해둬야 할 겁니다.
계속 가봅시다.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보류했다. suspended in beautiful equipoise
의미는 이겁니다. 예쁜 얼굴일지 미운 얼굴일지는 이 '흥미로운'--약간 열에 들뜬 듯 부양되어 있는, 기분 좋은 균형 상태--추론 과정에서 일단 판단을 유보했다. 그런데 equipoise라는 어려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저는 사전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프랑스 어원일 거라는 심증이 짙어지지요? 그래서 단어의 난이도를 감안해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조화로운 균형 속에서 보류했다"라고 옮기고 넘어갔습니다. 게으른 잠정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정도가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흐리마리하면, 또는 심오하면 그렇게 옮기는 게 정석 아닌가요? 번역자인 내가 당의정을 입힐 수는 없습니다. 혹시 은미씨는 문체를 획정하면서(그 아동틱한 문체!!) 어떻게든 독자들을 선명하게 이해시키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물론 이 지점에서 "잡지" 편집자라는 은미씨의 처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용인하고 말씀드리는 바 마음껏 고치세요. 저는 어떤 의미인지 알려드렸으니, 또 제가 왜 더 나아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해명했으니,
이젠 편집자의 몫입니다. 사실 이하의 문제들도 대개는 앞에서 주절주절 떠든 것과 비슷한 궤도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많이 들여서 길게 쓰셨으니 저도 길께 써야겠지요.
계속 갑시다.
"성공은 부분적이고 변덕스러웠다."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시면 ---> "작은 성과도 있었지만 그 추측이 맞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로 하실 수도.
제 말이 좀 거칠지요? 기분 상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닙니다.
훌륭한 편집자로서 은미씨 께서는 어색하고 거친 표현과 문장들을 잘 고쳐주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노골적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고치신 대목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2장에는 에피소드가 세 개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에피소드를, 제가 보시기에, 은미씨께서는 오독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내레이터와 대화하는 fair Incognita를 속왕의 아내로 옮기고 있는데도 말이지요.
사실 사태가 불분명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명백한 단서가 있습니다.
이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기다려 봤자네요!" 귀부인이 말했다. "자, 앉자, 어거그(Uggug). 내 새끼, 와서 옆에 앉도록 해라!"
여기서 영어 원문의 my Lady는 fair Incognita고, 상술한 문단의 다음다음 문단에서 my Lady was the Sub-Warden's wife라고 쓰여 있거든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장자의 호접몽처럼 불분명합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다고 쓰여 있자나요.
따라서 내레이터의 착각 여부와 무관하게 첫 번째 에피소드, 아니 적어도 두 번째 에피소드부터 대상 여성의 실체는 속왕의 아내입니다.
상술한 문단이 한 문단이라는 게 제일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여성을 실비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단 베일을 써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텔레파시 실험으로 "생각해낸 게" 명백히 실비라고 했다는 걸 인정한다면 말입니다.
호접몽 타령이 끝나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는데 아무튼 현실적으로 서술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대상 여성은 분명히 the fair incognita입니다.
화자가 판단을 유보하고 모른다고 후퇴한 셈이지요. 그런데 아씨라고 하다니요? 베일을 썼으니까?
세번째 에피소드로 연결되는 부분이 상술한 문단입니다.
따라서 저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그저 숙녀, 귀부인라고 하면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확대시키는 예비 단계로 삼았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명칭 변경은 제 원래 번역을 따르자면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미지의 여성'--> 그 숙녀-->귀부인.
따라서 두 번째 에피소드의 여자를 아씨라고 번역할 근거가 없습니다.
다시 첫 번째 에피소드와 연결한다고 해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도 my Lady가 나오지만 베일을 썼으니 정체를 알 수 없잖아요?
하여,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수긍하는지 아닌지-- 제게 알려주십시오. 스타일을 고치시는 건 상관 없지만 사실 관계에 대한 오역 책임은 제게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아씨'도 '여주인'으로 고쳐주세요. 속왕과 교수가 대화하는데, 실비가 끼어들지는 않습니다.
계속 갑니다.
남성 특유의 자만심 속에서 여성의 지력은 기본적으로 피상적이라고 생각한 탓이다.--> (이건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알아서 고치세요.)
또렷하게 말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앞 부분에 "사태를"를 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확실해지겠지요? 하지만 이미 고치신 대로 가도 상관없습니다. "딱 부러지게 말하긴 힘들겠군요"라고 잘 고치셨네요.
대문자 표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영어 문장쓰기에서는 여러 가지 강조법을 채택합니다.
성문 종합 영어에서 배우는 강조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들입니다.
두 번째는 인쇄 단계가 개입(구어를 문어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기동의 여지가 생기면서 쓰게 된 방법)하면서 쓰게된 방법들인데, 철자 조작입니다.
대문자 표기, 폰트 키우기, 이탤릭, 그리고 강조의 따옴표 등등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두 번째 방법은 별로 안 중요합니다. 당연히 첫 번째가 중요하고 번역할 때 그걸 잘 표현해내는 게 긴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적용하고 있는 이탤릭 표현이 좋은가요?
대문자 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비와 브루노>는 소설인데, 이탤릭과 대문자 표현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그냥 생략해도 좋다고 봅니다. 이 소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캐럴의 이런 진지함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후대의 독자들은 이런 내용을 꼼꼼히 살피고 발견하는 과정에서 매니아적 쾌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만, 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장에 나오는 AEneas에서 AE를 붙여 쓴 표현을 일일이 해명해줘야 합니까? "You mean the Patients?"에서 페이션트가 이탤릭에다가 P가 대문자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저는 대화문으로 "환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만 하면 된다고 봅니다.
저는 대문자 표현과 관련해서는 일일이 노출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부분과 관련해서도 저는 그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은미씨는 메일 중에 이렇게 쓰셨습니다.
"음, 소설은 (동화적인 느낌을 주건 주지않던 간에) 일단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을 줘서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특히 잡지니까 더욱). 물론 '실비와 브루노'같은 텍스트에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은 문턱을 낮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루이스 캐럴의 유머러스한 느낌이 좀더 살아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치광이 과학자 냄새를 폴폴 풍기는 교수의 휴대용 목욕자루 발명의 경우,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듯 하고 있는데... 목욕만 하더라도 plunge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고 있으니 자루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는 느낌을 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다이빙-목욕이라고 고쳤습니다만. 전신욕은 몸을 그냥 다 담근다는 의미니까,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건조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압니다. "감각적이고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루이스 캐럴의 유머"도 잘 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마음으로부터 드립니다. 은미씨의 역량이 보태져서 캐럴의 멋진 작품이 잡지에 소개되는 과정을 저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이빙 목욕"으로 바꾸자는 아이디어는 제게 큰 배움입니다. "유체역학은 물과 힘의 조합을 의미한다."는 캐럴이 괄호로 처리한 것으로 보아, 해설자로서 유체역학(hydrodynamics)이라는 학문을 소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중간계급, 곧 부르주아의 지적 자신감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것 같거든요. 따라서 소설 작문으로는 꽝이지요. Telepathy, Least Common Multiple(최소공배수), Hydrodynamics 등 현대적인 과학 용어의 갯수를 세서 캐럴의 정신 세계가 가졌던 지형도를 그려보는 일도 흥미로울 겁니다.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고 고치신 건 그냥 가도록 하지요. 은미씨의 이해 방식이 최종적인 결론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욕조 바깥으로 빠져나오는 부분과 관련해 해석된 내용을 이야기해봅시다. 은미씨는 저와 다르게 이해하시고 내용을 고치셨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욕조 안에 들어가서, 고리에 손가락을 걸고 물구나무 서기 자세 그대로 몸을 위로 밀면, 자루 밖으로 몸이 떨어진다는 뜻인데..." 저는 그렇게 영문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대 안에 고리 모양의 환상선이 있고 그걸 따라서 몸이 머리통부터 아래로 빠져나온다고 이해했습니다. 중력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래서 머리를 제외한 신체의 다른 부분이 한쪽으로 고꾸라질 거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제 해석에서는 for the thumbs 부분이 명확히 해명이 안 됩니다. going up-stairs야 내부의 나선 계단인데 아래로 내려가도 상관이 없는 것이니까 문제가 안 되고... 그런데 은미씨가 그리는 그림은 해당 문단의 내용으로는 비약이 심합니다. 안 그런가요? 물구나무 서기 자세를 유추할 수 있는 단어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횡설수설하는 내용이라 해석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제 해명을 들으셨으니 이제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제 해석은 있으니까요. 공간 이동은 이렇습니다. 객차(내레이터와 베일 쓴 여인.)-->객차(내레이터와 Incognita[속왕의 아내로 추정됨, 적어도 실비는 아님])-->조찬 식당(일곱 명으로 늘어남, 속왕, 아내, 어거그, 실비, 브루노, 교수, 대법관)-->3장에서는 조찬 식당에 실비와 브루노의 아버지 왕이 나타남 따라서 '객실'과 '갈아타세요'와 '어거그, 내 새끼', '속왕'도 다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이제 다 쓴 것 같습니다. 이로써 사실 관계는 적어도 바로잡히길 바랍니다. 3장은 언제까지 드리면 되나요. 해설을 조금 달겠다고 약속드리지만 전 이야기체는 안 쓰겠습니다. 정 병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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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주 전쯤부터 여친이 머리를 자르라고 성화였다.
옆머리가 볼품 없어지는 듯하여 오늘 드디어 전화를 했다.
나: 머리를 자르려고 하는데요? 그 놈 목소리: 좀 많이 기다리셔야 합니다. 나: 한 일주일 후면 자를 수 있을까요? 그 놈 목소리: 7월 초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낭패다. 목요일에 계약서 쓰러 가야 하는데, 가오가 안 서게 됐다.) 나: 보통 때 보다 더 많이 기다려야 하네요? 한층 더 겸손한 어조의 힘 마대기 없는 그 놈 목소리: 제가 영국에서 열리는 페스티발에 다녀와야 해서요. (뭐냐, 이건?) 난 더 정중하게 물었다. "그럼, 이렇게 묻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는데, 7~8월에도 따로 여름 휴가를 가시나요?" 이렇게 재차 물은 것은, 물론 당연히 스케줄 때문이었다.
내가 알고 있고 그 놈도 분명히 짐작하고 있듯이, 나와 그는 손님과 디자이너의 자격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시정잡배들처럼 모두가 하향평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을 암묵적으로 공유했다. 우리는 각자의 예의범절을 거의 극단으로까지 추종하며 대화했다. 이런 류의 대화가 갖는 본래부터의 허위성이란!
그 놈 목소리: 따로 여름 휴가를 가지는 않고, 1년에 몇 차례 페스티발을 구경하러 영국에 다녀옵니다. 그렇게 많이 쉬지는 않습니다. 나: 알겠습니다. 지금 날짜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고, 다음에 전화 드릴께요.
(그래 너 잘 났다. 이 기회에 여친이 탐내던 코끼리 물통이나 훔쳐올까?)
간지 안 난다고 너무 탓하지들 마시라. 나이 먹고 추해지면 곤란한데!
##### 1) 엄마 내려가심 2) 장사장은 <브레인 스토리> 인세를 7월에 정산해준다고 함. (이사간 사무실에 놀러오라 신다. <<스트링 코스모스>>하고 <<허블의 그림자>>나 얻어올까. 바람 쐬고 싶다. 3) 시합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연습을 좀 더 충실히 하겠다고 다짐함. 4) 이미용업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좋은' 직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말이 안 통해도 머리를 잘라주면서 먹고 살 수는 있다. 세 가지 색 <화이트>의 남녀 주인공도 머리 자르기 Fair에서 만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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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와 브루노 | 2007/06/1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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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자료용으로 좀 길게 인용하면  1886년에 캐럴은 <<실비와 브루노>>에 대하여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이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문학적 시도였다. 캐럴은 <<앨리스>>에서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공상을 마음껏 펼쳤고, 빅토리아 시대의 아이들도 똑같은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딱딱한 가르침이 없는 책을 읽고 몹시 즐거워했다. 그러나 캐럴은 어린이를 위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은 점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다. 이것을 풀기 위한 캐럴의 노력은 <<실비와 브루노>>라는 판타지적 장편 소설로 결실을 맺어 두 권으로 출판되었다. 성인과 청소년을 위한 이 소설을 쓰기 위하여 그는 오랜 기간 축적된 수많은 아이디어와 사건들을 기록해두었다. 캐럴은 1870년부터 유서 깊은 영국 귀족 가문 솔즈베리 후작 Lord Salisbury의 초대를 받아 그의 저택인 햇필드 하우스에 드나들기 사작하면서 주인공들이 겪는 모험을 후작의 자제인 세실 남매에게 들려주었다. 1873년 1월 2일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침은 화랑 the Gallery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실비와 브루노>>의 새로운 장을 들려주었다. 화요일에 이야기를 들려준 이후에 그것을 구상했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두어야 한다." 1년 뒤 1월 1일에도 캐럴은 "나는 그들에게 <대장장이와 개구쟁이 the Blacksmith and the Hobgoblin>와 <어거그 왕자 Prince Uggug>, 즉 <<실비와 브루노>>의 일부를 들려주었다"라고 적고 있다. "수많은 단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완성하기까지 많은 작업이 필요했다. <<실비와 브루노>>는 1889년 12월에 출판되었다. <<앨리스>>와 비교하면 이 작품은 정말로 방대하고 다루기 힘들다. 우선, 이 이야기는 400쪽에 달한다. 둘째, 모험은 <<이상한 나라>>에서처럼 사건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거울 나라>>에서처럼 줄거리를 사건별로 다루는 것을 고려하는 체스 게임도 아니다. 오히려 <<실비와 브루노>>에서 캐럴은 "(그가) 두려워하면서 탐구한 길이 ...... 밟아 다져진 길이고, 모든 길가의 꽃은 밟혀 뭉개진 지 오래다"라고 느끼면서 "다른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캐럴은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 보이고 싶었다. 그는 <<실비와 브루노>>에서 여러 의식 상태와 연관된 다양한 플롯을 사용하여 일종의 독창성을 성취했다. 이것은 "좋든 나쁘든" 새로운 길이었다. 이 속에는 현실의 세계(England), 외부의 세계(Outland), 요정들의 세계(Fairyland)가 공존하고 있다. 줄거리는 사랑에 관한 것과 정치적인 것 두 가지가 나란히 전개된다. 내레이터는 주인공들과 함께 서로 다른 세계를 옮겨 다니고, 이들 세계에서 이중적 의미와 별난 인물들, 톡톡 튀는 전개로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통의 상태"에서 내레이터는 다소 사실적인 연애 사건에 등장하는 일행 중 한 사람이다. 내레이터는 무의식 상태에서 동화 나라로 추방되는데 거기에서부터 두 어린이 요정 실비와 브루노의 모험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에 중간적인 "섬뜩한 상태"에서 리얼리티와 판타지가 혼합되고 요정들이 등장한다. 이야기의 세심한 구성과 문체가 이 작품을 다루기 어렵게 한다.  <<실비와 브루노>>를 훨씬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이 텍스트에 종교, 사회, 과학, 구성의 기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혼재하기 때문인데, 코헨은 이 작품을 "19세기의 삶과 생각으로 뒤덮인 거울"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읽기는 어렵지만 연구할 가치가 있다. 코헨 역시 "지적인 화려함, 재치, 시, 난센스 등 창의력이 풍부한 부분들"이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재미있는 실패작이다. 독자들의 반응도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고, 비평가들이 혹평했으며 판매 부수도 많지 않았다. 가드너도 <<실비와 브루노>> 두 권은 전체적으로, 즉 시적으로나 수사학적으로도 실패작이라고 단정한다. 이 이야기는 빅토리아 시대 어린이를 위하여 쓰였지만 이것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거나 정신이 고양된 어린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1893년에 <<실비와 브루노 완결편>>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첫 작품만큼 길었고 예술적으로 일종의 혼합물이었다. 비평가와 독자의 눈에 이것은 첫 작품 실비와 브루노의 모험의 가치를 훨씬 떨어뜨린 것으로 보였다. 양윤정, <<황금빛 오후의 만남--루이스 캐럴의 판타지 동화 앨리스의 세계>>(열음사)에서 새롭게 눈뜬 사실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솔즈베리 후작은 당시 식민지 인도를 경영하는 최고 부서 인도성 장관이었다. 그리고 인도의 총독 내지 부왕으로 번역할 수 있는 viceroy는 표절 시인이자 마약 중독자이고 반쯤 미쳐 있던 리튼 경이었다. 두 사람은 임명 과정에서, 또 "후기 빅토리아 시대 인도에서 펼쳐진 가뭄-기근 홀로코스트" 처리 문제에서 반목하고 다툰다. 햇필드 하우스를 출입하던 캐럴이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실비와 브루노>>에 나오는 세 개의 랜드, 곧 잉글랜드(England), 아웃랜드(Outland), 페어리랜드(Fairyland)의 삼중 구조에서 아웃랜드가 인도임을, 또 작품의 각종 에피소드들이 인도 사태의 각종 정황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판타스틱>>6월호에 실린 <<실비와 브루노>> 제1장 및 7`8월호에 실릴 2장과 3장의 정치적 에피소드들이 왜 그렇게 짜이고 서술되었는지를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1장의 제목은 <빵은 조금! 세금은 많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인데 이는 당시 인도의 기근 사태를 알면 능히 유추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리튼은 스미스주의, 벤덤주의를 신봉하면서 기근 구제를 외면한 채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여제로 옹립하는 낭비적 행사를 주관한다(해리 퍼니스의 삽화를 봐도 분명히 왕관을 쓴 왕과 속왕이 나온다). 3장의 왕권 다툼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개안은 전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책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책 덕분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에게 감사를!! 그래서, 두 가지만 더 보태놓자면 첫째,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가 <<실비와 브루노>>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 긴요하다는 것 둘째, 이 책의 가치와 관련해 지난 번에 했던 논평 "빅토리아 시대의 고루함으로 퇴행했다"는 평가를 철회하고 과도 단계의 유보적인 생각을 피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 둘째부터 이야기해보자. "빅토리아 시대의 고루함"이란 캐럴이 견지했던 기독교 윤리와 도덕 때문이다. <<앨리스>>에서는 순전한 호기심과 상상에서 비롯하는 거칠 것 없는 재미와 잔혹함 따위가 일종의 시대 정신이자 유행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이 점은 다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실비와 브루노>>에서 캐럴은 진지했다. 도덕을 얘기하고 싶었고, 책임 있는 사회 성원으로서 그것의 가치와 유용성을 믿었고,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푯대는 기독교 윤리와 구원이었다(<<실비와 브루노>>의 서문을 보라). 나는 '편의상' 무신론자이지만(사실 정확히 말하면, 무신론자 아니다. 인식론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무신론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이 문제는 다음에) 그래서 캐럴의 고루함이 한심하고 딱하지만, 공동체의 유지 보존에 일정한 가치 체계--정의와 도덕으로 대별되는--가 지도 이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개인적인 진실이 있는 바 캐럴의 한심하고 딱함을 그냥 보아넘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진지한 작품 <<실비와 브루노>>는 어쩌면 공들여 읽고 연구하면서 경청해야 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 더 열심히 번역해보려고 한다. 두 평자의 태도가 자못 흥미롭다. <<의미의 논리>>를 쓴 들뢰즈는 또 얼마나 심오하게 없는 의미까지 만들어가면서 텍스트를 비틀었을까? <<실비와 브루노>>가 실패작이라고 단정한 마틴 가드너 이 양반은 어떤가? 역시 미국놈이라서 프래그머티즘의 영향 때문에 표피적일까? 마지막이자 첫 번째 이야기, 바로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 앞에 써놓은 중요한 착상과 발견이 예시하듯이--언어는 둘째치고 문화적 배경이 후달리는 우리들은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절대로 못 따라간다. 이렇게 절망적으로 뇌까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하여튼 세계화는 진행되고 있고 무모하지만,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고 열세이지만 보편성이라는 지반 위에서 이 작업(결국 서양 내지 외래 문화 배우기)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앞으로는 겨우 쫓아가는 단계에서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기까지 할 것 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강대진이나 강태훈, etc(두 명밖에 생각 안 나네)-- <<실비와 브루노>>에 나오는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거의 모든 제재와 에피소드를 이잡듯이 뒤지고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내용과 관련해서 수고스럽고 재미있는 과정일 텐데--형식과 플롯, 말놀이, 넌센스 등은 들뢰즈가 주구장창 얘기하고 있겠지? 아직 안 읽었다--, 이 두 가지 형식과 내용에 대한 기꺼운 탐구와 모색은 캐럴이 제시한 가치, 곧 주제 의식에 동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동의하지 않으면 탐구와 모색은 고사하고, 작품 자체를 읽는 행위가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시 첫째 요소와 둘째 요소는 엇물리면서 함께 굴러간다. 못 다한 첫 번째 이야기의 각론 빅토리아 시대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였고, 제국주의 시대였고, 기술 문화의 시대였다. 1)기술 문화의 시대 철도와 사진술의 발명  기차 여행이 가져온 시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캐럴은 기차 타는 애기를 자주 하고 묘하게 비튼다) 볼프강 쉬벨부시의 <철도 여행의 역사> 참조 철도가 그의 마음 속에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켰을까? 철도 부설 재원 마련이 인도 농민들을 어떻게 수탈했고, 각국으로 파견된 노동자들은 축구 문화를 어떻게 현지에 전파했는가? 상대성 이론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철도 여행의 보편화이다. 자본주의 사회 일반의 시간 심화와 관련해서. 마틴 가드너에 의하면 캐럴은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를 허버트 조지 웰즈에 이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시도한 작가이기도 함. 또, 캐럴은 초기의 위대한 사진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누드 사진을 직접 찍기도 했고, 네 점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 곧 빨간 모자 차림을 한 테니슨의 조카딸 아그네스 웰드의 사진은 1852년에 런던 만국 박람회(기술 사회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에 전시되었다. (지금 2)산업 자본주의에 관한 얘기로 넘어가고 있음) 만국 박람회는 매우매우 중요한 행사였음. 구경꾼들이 탄생했고, 산업의 위용과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선진국들이 필수적으로 주관했던 행사였으니(에펠탑도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지어짐. 프랑스 강철의 우수성).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가건물 수정궁(Crystal Palace, 이것에 관한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제임스 트레필의 <도시의 과학자들>을 보기 바람) 건축으로 유명한 런던의 만국 박람회가 캐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3)빅토리아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캐럴은 외국 여행을 평생에 걸쳐 딱 한 번 했지만 많은 새로운 문물과 사태를 접할 수 있었다. <<앨리스>>에는 뉴질랜드에서 발견되었고, 이제는 멸종한 도도새가 나온다. <미친 정원사의 노래>에서는 악어와 물소와 캥거루가 나온다(아프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이외에도 정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 작업이 부디 수고스럽지 않기를. <사족> 스파이더맨의 고블린과 합가블린(도깨비, 장난꾸러기, 꼬마 귀신, 개구쟁이) 괄호 안의 설명이 고블린 캐릭터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네. 톨킨의 중간계나 제임스 배리(James M. Barrie)의 네버랜드(Neverland), 커트 보네거트의 트라팔마도어도 다 이 랜드들의 후예들인 셈. 우리 시대의 모든 현대성을 맹아적으로 구현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관한 좋은 안내서 한 권.
 Lord와 Sir는 영어로는 다른데 '씨발' 한국어로는 다 경(卿)이다. 짜증난다. 그런데, 도대체 지금 몇 시간째 안 자고 있는 거지? 24시간이다. 미친 거 아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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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여행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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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학 | 2007/06/10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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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친구들과--여학생도 몇 끼어 있었다-- 시내 번화가의 어떤 빵집에 갇힌 채 대학생 형들(과 누나들)의 시위를 목격했던 게 기억난다. 메캐한 최루탄 냄새도. 하숙집에서 3학년 형들과 별 의미 없이 나누던 이야기, 시내 한 복판의 전화 부스에 나붙어 있던 대자보--충격적이었고, 조용히 떠올려보면 지금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어진 7~9월 노동자 대중 파업 당시에는 선생 하나가 수업을 전폐하고 파업을 비난했었다(<조선일보> 따위를 읽고 앵무새처럼 그 논조를 되풀이했던 그 교사에게 막연한 반감을 느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 개인사는 집어치우자. 나는 아래 글을 두 번 읽었다. 내가 역사라는 큰 물줄기와 모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느낀다. 존경하는 사회주의자 최일붕 선배--그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도 한 장을 할애해 다루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의 회고는 이 블로그를 찾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청해야 할 이야기다. 오늘은 6월 10일이니까! 노파심에서 하나만 덧붙이자면, "모든 위대한 사회 운동의 훌륭한 점은 우리 모두가 그것으로부터 이익을 누린다는 데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반동적 생각에 침윤되어 있는 '당신'(?!)도 바로 그 운동의 이익 수혜자다.
항쟁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에게서 듣는 19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계급의 기억입니다" 한규한 기자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다. 당시 항쟁에 참가한 최일붕 동지('다함께' 국제연락 간사)에게서 항쟁의 생생한 전개 과정과 제기되는 논점들을 들어 본다. 당시 최일붕 동지는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정치 활동을 했다. 그는 군포의 한 민중교회 노동야학 활동을 하면서 분신 택시 노동자 박종만 열사 추모사업회 활동을 지지했고 사회주의 써클 활동도 하고 있었다.
6월 항쟁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은 무엇입니까?
원인과 배경으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첫째 원인은 두루 알다시피 정치적 억압이 너무도 혹심하고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정권이라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있었어요. 정치적 억압의 극치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씨 고문 살인 은폐·조작, 6·10 항쟁 전날 이한열 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경에 빠진 일들이죠. 그밖에도 많은 의문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당시 빈부격차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었어요. 1987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사회가 불평등하고 소득격차가 심하다고 답변했어요. 셋째, 부패와 비리가 극심했어요. 이철희·장영자 사기 어음 사건, 명성 사건 등 엄청난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은 첫째, '3저 호황'이라는 굉장한 경제 호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감이 많았습니다. 둘째,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 전환, 국가통제 자본주의에서 요즘말로 신자유주의로 전환이 세계적 규모에서 일어나고 있었죠. 1960년대 말 서구의 68항쟁도 그런 배경이 있었고, 한국보다 몇 년 늦은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동유럽의 변화도 그런 배경 아래 벌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제를 다국적화해야 한다는 필요, 그걸 통해 경제 전반을 고도기술 경제로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필요 때문에 지배계급 안에서 개혁 필요성을 느끼고 강조하는 분파들이 있었던 거죠. 일부 민간 자본가들, 대체로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부 중소자본들이 그랬죠. 6월 항쟁은 전반적 경제 구조조정과 지배계급 내의 분파 투쟁 격화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6년 '5·3 인천 사태'를 빌미로 전두환 정권은 탄압을 강화했는데, 이 탄압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고, 이 투쟁 평가를 둘러싼 좌파 내 논쟁은 어땠습니까?
1983년 말 유화조치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정권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져서 그런 거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안정됐기 때문이라는 거죠. 저는 그런 측면보다는 다른 사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이게 상당히 두드러졌어요. 그래서 달래는 측면이 강했다고 봐요.
어쨌든 1985년 들어 정권이 탄압으로 돌아섭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를 유화국면이 끝나는 시점으로 봐야 합니다. 이런 데는 무엇보다 노동자들의 반란이 시작됐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1985년 초에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고, 6월 초여름에 대우어패럴 등 구로연대 파업이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작지만 많은 노동쟁의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던 거죠. 둘째 1985년 2·12 총선에서 정권이 야당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전투성이 고무되던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거죠. 정권은 야당을 총선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대화를 시도해 체제 내로 포섭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어요. 정권의 얄팍한 떡고물로는 야당이 넘어가지 않았던 거죠.
그런 상황에서 '5·3 인천 사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익환 목사가 미국에 대해 유화적인 발언을 해 오해를 자아낸 일이 있었어요. 그 때문에 좌파 내부에서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민통련이 상당히 전투적으로 5·3 투쟁에 임했어요. 화염병도 직접 만들고 시위를 주도해서 주안역 5거리에서 전투를 벌였거든요. 그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한 것이 주체사상파였어요. 이들은 1985년 여름부터 부활하기 시작해서 세력을 넓혀 오다가 '5·3 인천 사태' 평가를 내놨습니다. 이 투쟁에서 불필요한 급진주의를 채택했다고 비판을 하면서 강령적·전략적 입장을 내놨거든요. 대충 '반국적 관점에 서지 말고 한반도 전체를 보는 전국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예비군 훈련·산별 노조 문제 등 강령적 입장에 전략적 입장까지 내놓으면서 '5·3 인천 사태'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활동가들에게 먹혀 들었어요. 왜냐하면 추상적 원칙을 내놓는 것을 넘어서 강령적이고 전략적인 입장을 내놓으니까 사람들이 흡족하게 느낀 것이죠. 그래서 순식간에 수많은 활동가들이 주사파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죠.
1986년 탄압 강화로 건대 사태가 벌어지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살해 사건 등이 벌어졌는데, 당시 좌파들은 사태를 어떻게 봤습니까?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이인영은 학생운동이 다시 침체에 빠졌다고 보기도 했다는데요?
그런 단견에 기초한 일면적 평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있습니다. 특히 충격적 탄압 사건을 접할 때는 더 그렇죠. 건대 사태도 그래요. 처음에는 단순히 집회를 봉쇄하고 해산시킬 줄 알았는데, 경찰이 학생들을 토끼몰이 하듯이 건물로 몰아넣고 물·전기 끊고 식량 반입도 끊었죠. 또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방류하면 남한 전체가 물에 잠긴다는 방송이 나온 게 건대 점거 중이었거든요. 그러고는 1천 몇 백 명의 학생들을 구속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 평가가 나온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때 그 평가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입장을 더 분명히 정리했죠. 그게 당시 상황에서는 주효했던 전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대중운동이 고양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간 귀에 거슬리는 듯한 급진성을 완화하고, 선진적 대중에게 다가가는 언어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폭력도 삼가는 전술 방침이 유효했던 거죠. 그런데 6월 항쟁 때는 그것이 또 나쁘게 작용하기도 했어요. 경찰이 최루탄으로 마구 공격을 해대자 선진적 대중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돌을 들고 싸우려 했는데, 그런 것까지 '비폭력! 비폭력!' 하면서, 마치 비폭력이 원칙이나 되는 양 사람들을 말리는 부정적 상황으로 나타난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6월 항쟁까지 가는 기간 동안에는 그것이 약이 됐죠.
1986년에는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가 민중항쟁으로 물러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당시 활동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또, 이것이 미국의 지배 전략에 미친 효과는 무엇입니까?
1986년 2월 필리핀 '피플 파워' 혁명은 단지 좌파만이 아니라 민중 전체에게 말할 나위 없이 고무적인 충격을 주었어요. 사람들은 '여기도 끝장이다', '전두환은 마르코스보다 더 불행한 운명을 맞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며 사기가 하늘을 찔렀죠. 반대로 전두환은 공포에 떨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탄압을 강화하려고 했죠.
미국 레이건 정부의 입장은 필리핀에서 좌충우돌했어요. 최후 순간까지도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번복하려 했고, 레이건은 기자들 질문에 막 신경질내고 그랬거든요. 필리핀 사태 이후 미국 정부는 기회주의적인 입장으로 변했어요. 그 전까지는 노골적이고 일방적인 독재 정권 지지 입장이었는데, 필리핀을 겪고 나서는 친미의 범위 안에서라면 될 성싶은 자들을 지지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약간 바뀐 것이죠. 이 게 효과를 보게 된 것은 이후 1987년 6월 한국 상황에서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군대를 투입하려 하자 미국은 '군대를 투입하면 내전 상황으로 간다', '제2의 필리핀 꼴 난다' 해서 그걸 막게 됩니다.
6월 10일 이후 항쟁의 규모가 급속하게 커졌는데 당시 분위기를 전해 주시죠.
1985년 하반기는 '유화국면'이 끝나가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았어요. 상당한 자신감과 전투성을 느낄 수 있었어요. 1987년 박종철 사건이 났을 때도 사람들은 격분과 동시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2월 초 서울대에서는 정부가 탄압했는데도 고문 치사 은폐·조작에 항의하는 추모제가 있었습니다. 저도 추모제에 참가해 함께 행진했는데,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았어요.
6월 10일 상황에서는 '이번에는 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 '제2의 4월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죠. 적어도 선진 부문에서는 이 점이 분명했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시 학생 투사들도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등 유연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그게 전반적으로 보면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엄청난 국민적 지지가 있었습니다. 전경들이 비무장 학생들을 두들겨 패면 거리의 시민들이 전경한테 달려들어 삿대질하면서 야단을 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지지가 많았습니다. 잡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요.
6월 항쟁이 학생과 이른바 중산층의 투쟁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 이들이 7월에 시작한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에는 등을 돌렸다는 평가가 있는데 이런 평가에 어떤 정치적 맥락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항쟁에서 노동자들이 한 구실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중산층은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상인들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소위 중산층이 6월 항쟁에 가세한 것은 6월 항쟁 초기가 아니었습니다. 중산층이 주도 세력은 아니었죠. 사무직 노동자들과 영세 상인들은 나중에 합세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대중운동이 엄청 강력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항쟁 초기부터 날품팔이·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조직이라는 게 가능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점은 지방 도시에서 더 분명했어요. 성남·안양에서 그랬죠. 부산에서도 처음부터 사상공단·사하공단 노동자들이 대거 참가했죠. 당시 저는 군포에서 활동하고 있어 안양으로 집결하곤 했는데, 안양에는 전문대가 하나 있는 정도라 [소수 학생을 뺀] 나머지는 전부 다 안양이나 군포의 노동계급이었어요. 따라서 '중산층 중심'이라는 말은 많이 과장돼 있습니다. 중산층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기도 하고요.
학생과 중산층이 7월∼9월 노동자 파업을 외면했다고 하는데, 먼저 학생들은 준비가 안 돼서 그랬어요. 학생들은 당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이나 '민족민주 혁명' 등 모종의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지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때문에 1980년대 새로운 좌파 사상을 재발견해서 흡수했던 청년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노동자들이 그토록 대규모로 일어서리라는 것을 예상도 못했고 당황했다고 말할 수 있죠.
상인들이 노동자 투쟁을 외면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계급 성격으로 봤을 때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 아닙니까?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강력해져야만 노동자 쪽에 호의적이게 될 테니까요. 사무직 노동자들은 민주주의 기본권 문제에서는 상당히 선진적이었지만 계급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8월 말 9월 초 들어서는 그들 자신이 파업을 하고 노조를 만들었거든요. 따라서 '중산층의 외면'이란 말도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죠.
6월 항쟁은 사회적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국민적 투쟁이었어요. 단지 학생, 소위 중산층,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정말 다계급적인, 그야말로 독재정권의 학정에 반대하는 사람들,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 지지했을 정도였죠. 거기에 노동계급 사람들이 대거 참가한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군대 투입을 고려했지만 미국이 군 투입을 막았는데 그때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노동자들의 참여였죠. 노동자들은 거리의 투쟁에서 축제 분위기와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죠. 당시 막강한 국가권력 앞에 사용자들도 절절매던 시대였는데, 그 국가권력이 후퇴하니까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얻어 사용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던 거죠.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정치 투쟁과 경제투쟁의 상승적 상호작용이 그때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은 어떤 세력이 주도했고 그들의 정치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오늘날 한미FTA저지 범국본과 비교해 본다면요?
당시 국본은 명백히 김영삼과 김대중이 포함돼 있었어요. 그리고 민통련이 있었죠. 말하자면 주축 세력이 자유주의적 야당과 좌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계급적 성격에서도 모종의 인민전선, 즉 국민연합적 성격이 분명했죠.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술적으로도 그것을 거부한 채 싸운다는 것은 효과가 없을 뿐더러 심지어 고립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본에 참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삐걱거리는 측면이 있었어요. 6월 항쟁이 대략 6월 18일에서 26일까지가 고비였는데 18∼19일에는 특히 군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때 국본 내에서 [자유주의 야당과] 아주 심각한 언쟁이 있었어요. 또, 7월∼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넘어갔을 때 국본 내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세력이 이 투쟁에 부정적이었죠. 8월 중순 경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매우 부정적이었죠.
오늘날 한미FTA 저지 범국본과 비교하면, 범국본에는 두드러진 자본가 세력이 참가했다고 보이지는 않아요. 좌파 세력이 더 주도적이고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 점은 제국주의 문제에도 반영됩니다. 당시 야당은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문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게 강했죠. 당시 국본 내에서는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자유주의 야당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국본 내 좌파도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오늘날의 범국본은 제국주의 문제도 당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의식을 하고 있죠.
당시 자유주의 야당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중에게 분노의 초점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종종 투쟁을 억제하려는 시도도 했던 것 같은데 야당이 민주화 투쟁에서 했던 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좌파는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했을까요?
후자부터 답변을 하자면, 당시 좌파는 NL과 CA가 있었습니다. 당시 CA는 자유주의 야당 세력을 '주적'이라고 규정하지는 않고,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야당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많이 할애했어요. '정치적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전술적 제휴라는 점은 완전히 실종돼 있었어요. 전술적 유연성이 없었죠.
나중에 전두환 회고록 같은 게 공개됐는데, 전두환이 '자민투(NL)가 유연한 것 같지만 그들이 당면한 적이다. 민민투(CA)는 야당 밀어주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잡겠다고 하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정권 입장에서는 당면한 적이 자유주의 야당과 동맹하고 있는 주류 좌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력은 암묵적으로 전술적 제휴를 거의 원칙 수준으로 격상시켰어요. 인민전선론이었던 거죠. 따라서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야당이 어떤 역할을 했느냐는 물음으로 넘어갑니다. 6월 항쟁 직전까지는 야당이 대중운동을 억압하거나 해체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지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대중운동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반정부 분위기는 강력했지만 그것이 6월 돼서야 대중운동이 됐으니까요. [항쟁이 시작되자] 야당은 운동을 은근슬쩍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려 했는데, 그게 직선제였어요. 사실 운동의 구호 자체는 분명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민주 쟁취' 이런 거였거든요. [운동 차원에서는] 직선제 요구가 기조로나 요구로나 명확하게 정식화된 바가 없어요. 그런데 은근슬쩍 좌파 세력은 자신들이 직선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착각한 거죠. 물론 일부는 명확하게 그것을 구호로 외치기도 했어요. '직선제로 독재 타도' 구호를 외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것은 국본 안에서 정식화된 적은 없거든요. 그러니까 암암리에 야당이 원하는 대로 맞춰진 거죠. 자유주의 야당이 운동을 일정 수준에서 통제하려는 모습이 분명해진 때가 6월 18일∼19일 군대 투입 얘기가 흉흉하게 나돌 때입니다. 그때는 책상을 치면서 언쟁하던 그런 상황인데, 당시 미국이 절대 군대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개입했습니다. 군 투입이 오히려 더 큰 사태로 발전할까 봐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야당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야당이 아래로부터 운동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통제하려 했던 때는 노동자 대투쟁이 고양된 8월 중순이었습니다. 이 때는 정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반노동자 언사를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자유주의 야당의 비위를 맞추던 언론들도 다 돌아서던 상황이었죠. 또 하나의 사례로, 8월 어느 날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 때였습니다. 김대중의 연설 시간이 있었어요. 그는 연단에 올라가더니 군중 쪽에서 휘날리던 삼각형 빨간 깃발, 민중민주라고 적힌 깃발을 보자마자 대뜸 '그 깃발 내리세요'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나이 40∼50대의 깡패처럼 보이는 우락부락한 야당 지지자들이 청년들을 위협했습니다. 위축된 젊은 청년들은 깃발을 내려야만 했어요. 이런 자유주의 야당의 계급적 본질은 오히려 6월 항쟁 이후 계급투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죠.
노태우의 6·29 선언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당시 국본이나 좌파는 이 선언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을까요?
대체로 좌파는 노태우의 6·29 선언이 굴복인 동시에 기만이라고 봤어요. 즉,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국본의 공식 성명은 환영에 무게가 실려 있었고 CA 같은 초좌파적 입장에서는 기만이라는 측면, 운동이 체제에 포섭되기 시작했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죠. 제가 볼 때 둘 다 잘못된 입장이죠. 밀려서 후퇴한 것이자 동시에 시간 벌기라는 두 측면을 다 봤어야 맞는 것입니다.
6·29 선언 이후 김대중과 김영삼은 따로 대선에 출마했고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당선했습니다. 당시 좌파들의 대선 전술은 어땠습니까?
두 김 씨가 각각 대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너무 뻔한 예측이었어요. 군사 정권 측에서 6·29 선언으로 양보했을 때 이 점도 계산에 있었거든요.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다른 지역 자본가들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었다는 점이 이들의 독자 출마를 예상할 수 있는 근거였죠. 운동 쪽에서는 이들에게 단일화하라고 압력을 넣을 필요는 있었습니다. 다만 그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자본가 세력들이 단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두 김 씨가 단결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폭로하고, 설사 '이번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안 돼도 너무 절망할 필요 없다. 운동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갈등은 더 첨예해질 것'이라는 점을 내다보고 사람들에게 준비시키는 게 필요했죠. 대선에서 자유주의 세력으로 군부를 패퇴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조급한 생각이자 선거주의로 빠질 위험성이 있었어요.
그리고 두 김 씨가 대선에 따로 나가는 게 확정됐을 때, 운동의 대부분과 노동계급의 더 큰 부분이 김대중을 지지하니만큼 사회주의자들은 김대중에 비판적 투표를 하는 것 외에 대안은 없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비판적 지지'라는 말과 달리 갈수록 '무비판적 지지'였다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1986년 들어 학생운동에서 이른바 주체사상이 급속하게 영향력을 넓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점에서 1960년 4월 혁명이나 1970년대 민주화 투쟁에 참가한 학생들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급진화한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또, 당시 좌파의 사회변혁 전략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는 냉전 체제였잖아요? 물론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는 등 옛 소련에서는 변화가 시작됐지만, 아직 그것을 눈치채기에는 냉전이 가하는 무게가 강했습니다. 냉전 상황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라는 사고가 횡행하기 쉬웠고, 한국 좌파에게는 북한과 소련이 진정한 친구처럼 비치기가 십상이었죠. 따라서 [1986년에 주체사상과 소련식 맑스·레닌주의가 확산된 것은]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주체사상이나 소련식 맑스·레닌주의가 좌파들에게 대거 수용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급진화가 진행될수록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봐요. 운동의 급진화, 정치적 급진화가 냉전 상황과 맞물린 것이죠.
당시 NL과 CA는 한국이 결코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위한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입장이었어요.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 때문에 그렇다', '종속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입장이었으니 [전략이] 모종의 민주주의 혁명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6월 항쟁 자체에 미친 [악]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6월 항쟁이 날마다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날마다 전쟁 상태였는데, 갑자기 6월 30일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거리가 깨끗해졌습니다. 그 후 7월 9일은 이한열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1백만 명이라는 말도 있는데 적어도 50만 명에서 1백만 명 사이 모였다고 봐요. 하여튼 엄청난 인파가 시청에 모였죠. 당시 시위 지도부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모일 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청와대로 진격합시다' 해서 수십만 명이 코리아나호텔쯤 갔지만,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마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어요. [이 모습은] 청년 학생 좌파들이 준비돼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진일보를 내딛었다는 낙관과 기대가 광범한 대중의 더 주된 정서였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좌파들이] 7월 이후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이지 6월 항쟁의 도상에서 큰 문제는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술·전략 문제에서 NL이라는 주류 좌파가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게 너무 경계심을 풀고 독립성을 세우지 않았던 문제점은 있었을지언정 혁명적 이론의 문제 때문에 재앙적 결과가 빚어지지는 문제는 없었다고 볼 수 있죠.
그 점에서 이한열 장례식 투쟁이 전술적 목표가 불분명한 투쟁이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 투쟁을 계기로 6월 항쟁은 끝물로 갔다는 평가도 있고요.
목표가 불분명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했어요. 당시 저는 트로츠키주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국에서 투쟁은 민주주의 요구에서 머물지 않고 노동계급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점을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 '6월 항쟁에서 승리했으니까 이제 노동계급 차례다' 이렇게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죠. 7월 9일 몇 일 뒤쯤에야 노동자 투쟁이 범상치 않다고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말할 나위 없었죠. 트로츠키나 룩셈부르크는 금기시하고 스탈린주의만이 알려져 있던 우리 나라 좌파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그냥 민주주의 투쟁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6·29 선언에 직면했을 때 승리의 도취감이 지배적이었던 것이고,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던 거죠. 승리의 도취감 때문에 [장례식 투쟁에] 대중도 광범하게 나왔는데, 이것은 6월 항쟁보다 큰 규모였거든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왔지만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청와대로 가자는 것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6·29 선언으로 뭔가 달라진다는데 좀 봐야지' 하는 관망의 분위기였죠. 오늘날의 눈으로 과거를 투사하는 식은 그리 정확한 인식이 아닙니다.
87년 항쟁 이후 '개혁 정부'들이 등장했습니다. 어쨌든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지만 개혁은 실패했고, 게다가 신자유주의 공세가 본격화됐습니다. 이 때문에 더는 '87년 체제'가 의미 없다는 주장이 많아졌습니다.
'87년 체제'가 의미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상부구조만 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1987년 항쟁은 1945년 이래 남한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항쟁을 계기로 권위주의 정치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계급의 조직, 노조 같은 일상 조직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정치 조직도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게 본격화된 것은 10년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그 단초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 자유권이 신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밖의 많은 변화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자본가들이 점점 보수화하기 시작한 점, 문화적 개방도 시작한 점 등 모든 변화들이 1987년을 전환점으로 합니다. 따라서 '87년 체제'의 종말을 일면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래로부터 관점에 서 있지 않은 걸로 보여요.
'87년 체제'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중 상당수는 1997년 IMF 위기를 기점으로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 이는 일면적입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정권도 상당히 시장주의적이었거든요. 일관된 신자유주의가 아닌 국가통제가 강하게 결합된 시장주의였지만, 집권하자마자 전두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은행들을 통폐합하고 민영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농산물 수입 개방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1997년을 기점으로 그 이후에야 신자유주의로 전환됐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민주화 항쟁 이후 국가와 자본간의 관계가 변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 항쟁이 시장 권력을 강화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죠. 앞서 말했듯이 당시에는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전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고도기술 자본주의로의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국가와 자본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점은 이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부터 꾸준히 나타났던 바입니다. 그 때문에 국가로부터 독립하고 싶어하는 자본들의 입장을 대변한 자유주의 야당이 6월 항쟁에 포함돼 있던 거 아닙니까? 따라서 한 측면인 거죠. 또, 6월 항쟁 한번으로 단숨에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핵심은 노동자 대중조직의 성장을 사회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즉,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 성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 편승해서 자본도 권력을 더 확장하려 했거든요. 그래서 단지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만을 놓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에 앞서서 자본·국가와 노동 사이의 계급 세력 관계를 먼저 봐야 합니다. 그 속에서 자본이 계급간 세력 관계 변화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자율성을 확대해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하는데, 이것도 너무 일면적으로 강조해서는 안 되죠.
6월 항쟁 직전까지 학원에 경찰이 상주하는 등 국가의 정치적 억압이 심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국가의 정치적 억압은 덜해졌다지만 신자유주의가 대학에 본격화하면서 학사 행정은 전보다 억압적인 것 같습니다. 20년 전의 대학과 오늘날의 대학을 비교해 본다면요?
우선 대학에서 경찰이 철수한 것은 정확히 1984년 초에요. 1983년 말 유화 조치의 일환으로 적어도 가시적으로는 경찰이 철수했죠. 물론 경찰의 밀정들이야 계속 활동했지만요. 6월 항쟁 당시의 대학이 오늘의 대학보다 조금 덜 억압적이었다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당시 학생들의 투쟁이 강력했다는 사실의 반영이에요. 학생들이 무지 전투적으로 싸웠어요. 광주항쟁 이후에도 소규모일지라도 학생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거든요. 몇 분 동안 잠깐 구호 외치다 체포될지라도 투쟁을 했고, 도서관에서 밧줄로 몸을 동여매서 구호 외치다 떨어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 저항과 저항적 분위기가 광범했었다는 게 먼저 지적할 측면이죠. 그런 저항이 확대되고, 국민적 지지 여론이 광범하다 보니 대학 당국도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어요. 객관적 요인으로는 경제가 호황이라는 조건이 있었다는 점, 자본가들 일부도 어느 정도 강압적 정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다는 점 등이 있죠. 또, 당시 졸업정원제로 입학 정원을 대폭 늘렸는데, 이는 학생을 많이 받아들인 뒤에 쪼아서 공부를 많이 시키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를 학생들이 또 강하게 반대하니 사실, 입학[만] 쉬워진 측면이 있었죠. 이런 것도 부차적이지만 한 요인이 될 수 있겠죠.
7월∼9월 노동자 투쟁이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연결되지 못하고 그 과제가 지연된 것이 한국 사회 진보의 비극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느 역사를 봐도 노동 대중의 의식이 순식간에 노동조합 의식에서 사회주의 의식으로 도약한 사실이 없어요. 심지어 러시아 혁명에서도 경제 공황의 재앙, 제국주의 전쟁, 절대주의 전제 정부에 맞서 싸운 강력하고 전투적인 러시아 노동계급조차도 그랬습니다. 2월 혁명을 일으킨 그들은 무려 8월 말 9월 초까지 소비에트와 정부 내의 온건 좌파 세력을 지지했거든요. 게다가 한국의 1987년 항쟁은 혁명적 상황에서 벌어진 게 아니었어요. 경제 호황기여서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싸우면 자본가들의 양보가 가능했던 시기였죠.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싸워 그 해 임금을 10퍼센트 이상 순식간에 인상시키고, 1988년과 1989년에도 계속해서 임금을 인상시켰습니다. 그래서 1989년 말 1990년 초에 이르면 한국 노동자들은 서구 노동자 생활 수준의 60∼70퍼센트까지 생활 수준을 높일 수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독자적 정당을 건설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죠. 게다가 부르주아 야당 인사들이 수십 년 동안 군사 정권에 의해 혹심하게 탄압을 받았다는 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중에는 목숨까지 위협받으며 망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환상이 컸거든요. 그런 점에서 당시 노동자들이 정치세력화를 조기에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 와서 애석해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비현실적 관점입니다.
일부 학자는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독립노조를 건설했지만, 그 후 정부는 노동조합 간부층을 체제 내로 통합하는 데 성공해 오히려 체제를 안정시키고 강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 변화를 1987년 직후로 보는 것은 너무 시점을 빨리 보는 것이자 추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노조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시기의 노조냐 하는 것입니다. 1987에서 1990년 초 시기는 노동운동이 고양되는 시기였어요. 경제적으로도 호황기였죠. 노조 운동이 일시적이지만 퇴조하고, 경제 위기로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하고, 소련이 무너져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방향 감각 상실에 빠지고 하는 게 1991년 말부터거든요. 노조 관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94년부터라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게 1997년 그들이 노동법 개악에 맞선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입니다. 노조가 형성되면서, 즉 노동자 대중조직이 건설되면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노조 상층 간부들이 기성 체제로 통합되는 것만 보는 것은 일면적입니다. 노조는 양면성을 같이 봐야 하는 거죠. 노조는 체제에 포섭되는 측면도 있지만, 노동자들의 불만과 전투성을 어느 정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성도 있는 거죠. 그래야만 조합비도 걷을 수 있고 위원장으로서 위세도 떨칠 수 있죠. 일면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어떤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3∼4천 명의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소위 위장취업을 해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했다고 합니다. 6월 항쟁에서 그들이 한 구실은 무엇이었습니까?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광범한 위장취업 전술을 채택했던 것은 사실인데, 6월 항쟁까지 대부분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7∼9월 노동자 파업 때도 학생들의 경제 선동에 의해 벌어진 것은 극히 드물었죠. 어떤 통계에 따르면 8∼9백만 명이 파업에 연루됐다고 하고, 어쨌든 수백만 명이 파업을 했는데, 그 중에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선동해서 한 것은 정말 극히 드물었을 겁니다. 당시 알려지지도 않았고요. 물론 1985년 대우차 파업 때 송경평 씨라는 서울대 출신 활동가가 선동한 게 주효했고 구로 연대파업에서도 그런 점이 있었죠. 공장 안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 지구에서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선동이 효과를 보기도 했죠. 바로 그 때문에 정권은 혹심하게 탄압했고 곳곳에서 학생 출신 활동가들이 색출당하고 있었어요. 권인숙 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죠. 학생 출신 활동가들은 탄압으로 솎아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주변적인 마치꼬바 같은 데 들어가 활동도 못하고 단순 노동자로 있다가 항쟁을 맞았기 때문에 별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1987년 대투쟁을 전개한 노동자들이 이제 보수화해 전처럼 투쟁에 나서지 않을 거라는 비관도 있습니다.
노동계급 투쟁에 대해 그런 전망을 하는 분들은 노동계급의 의식이 매우 단선적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단선적으로 후퇴한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노동자들의 의식은 불균등하죠. 같은 부문의 노동계급, 심지어 한 사람의 노동자조차 부침을 겪는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거죠. 1987년에 투쟁했던 노동자들 중 간부가 된 사람들만 보는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노조 지도자 위치에 있게 되면 그 사람들의 전투성 문제와 연관되는 노동조합의 성격 문제가 상당히 작용하거든요. 사용자와 교섭을 해야 한다는 노조의 본질적 기능 때문에 투쟁을 이끌기도 해야 하지만 일정 수준에서는 통제해야 하는 역할도 하거든요. 또 당시 노동자들이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까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박, 특히 지난 1990년대 말 이래 경제 위기가 대중의 삶과 정신을 괴롭히기 때문에 1987년의 노동자가 지금의 노동자일 수 없거든요. 따라서 노동운동은 부침을 겪기 마련이고, 오늘의 전투적 노동자는 오늘의 시점에서 관계를 맺어야지 자꾸 과거를 기준으로 본다거나 거꾸로 현재의 조급한 눈이나 개량주의적 눈으로 20년을 투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노무현 자신도 6월 항쟁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점에서 우리가 20년 전의 항쟁에서 배워야 할 교훈과 과제는 무엇입니까?
앞서 말했듯이 6월 항쟁은 여러 계급들이 민주라든가 평등, 자유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도 단결할 수 있는 투쟁이었어요. 그런 투쟁은 승리한 뒤 분화를 겪기 마련이에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낡은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민주주의 문제도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죠. 그러나 새로운 과제, 즉 계급투쟁이 더 중요해지기 마련인데, 그것이 뜻하는 바는 6월 투쟁으로 뭉쳤던 세력들이 갈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 중 가장 온건한 세력이 먼저 배신하는 거고, 김영삼이 3당 야합을 한 게 그런 예라고 할 수 있죠. 노무현도 그런 맥락이죠. 그가 6월 항쟁의 일부분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진정한 주체인 양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아요. 자유주의 야당이 결코 주된 부분이 아니었거든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청년 학생들이었어요. 6월 항쟁은 거리 전투가 주된 형태였는데 거리 전투를 조직하고 주도한 것이 청년 학생들 아닙니까? 또, 참가자 수준에서 보면 노동자 대중이 가장 주된 세력이었죠. [게다가] 6월 항쟁의 이상, 민주주의로 집약됐던 급진적 이상들에 비춰 보자면 노무현은 배신자죠.
일부 노동자주의자들은 6월 항쟁보다는 7∼9월 노동자 투쟁만 보는데 이는 잘못 보는 겁니다. 마치 6월 항쟁만 얘기하고 노동자 투쟁은 얘기하지 않는 사람들과 정반대지만 거울 이미지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는 명백한 연속성이 있거든요. 노동계급 대중이 미조직 개인들로, 군중으로서 정치투쟁에 참가한 것이죠. 다시 말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작용이라는 것이 고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묶어 주고 6월과 7∼9월을 이어주는 이상은 단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권만이 아닙니다. 아주 발본적인 의미의 민주주의,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해방이라는 이상이 우리를 묶어 주었거든요. 이런 이상은 오늘날 피억압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의 대의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진보·진출이라는 점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은 우리의 항쟁이고 연속된 7∼8월 항쟁과 묶어서 우리의 전통, 우리의 대의,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기억, 계급의 기억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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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배한 혁명 크리스 하먼 지음, 임성윤 옮김 / 풀무질 나의 점수 : 아래 기사는 스크랩 클레어 퍼몬트(영국의 사회주의자) 독일의 지도적 사회주의자 칼 리프크네히트는 카이저[독일 황제]의 궁전 창문 너머로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자유의 날이 밝았습니다. 저는 모든 독일인의 자유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모든 독일인에게 손을 내밀며 세계 혁명을 완수하자고 호소합니다. 세계 혁명을 원하는 분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수천 명이 손을 들었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의 유쾌한 나날들은 그랬다. “4년 간의 전쟁 때문에 피 흘리고 굶주렸던 사람들이 이제 무장한 병사들과 붉은 깃발들을 따라 교외에서 도심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구(舊)질서는 일소됐고, 왕정은 무너졌다. 이렇다 할 권력을 가진 기구는 노동자·병사 평의회뿐이었다. 그러나 하먼이 보여 주듯이,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과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은 별개 문제였다.” 그 뒤 5년 동안 독일은 혁명적 열정과 반동적 공세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노동자들은 두 차례나 ― 1920년 카프 무력정변 뒤에, 그리고 1923년에 ― 권력 장악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들의 희망은 좌절됐다. 1982년에 초판이 나왔고 1997년에 재판이 발간된 이 흥미진진한 책의 중심 주제는 독일 혁명이 패배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많은 냉소적 비판가들의 주장과 달리, 독일 혁명의 패배는 불가피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은 존재했다. 그러나 주관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물음은 이렇다. 좌파 단체들은 급진화한 수많은 노동자들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했는가? 또는 그럴 수 있었는가? 좌파 단체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는 사회민주당(SPD)이었다. SPD는 당원이 1백만 명이었고, 선거에서 4백50만 표를 얻었고, 90개의 일간지를 발행했고, 수십 개의 클럽과 수백 명의 상근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 맑스주의 언사를 늘어놓았다. 가히 무슨 일이든 이룰 성 싶었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라는 시험에 빠지자 SPD는 혁명적 변화의 전망보다는 낡은 자본주의 질서를 선호했다. 이 점은 이미 1914년에 분명히 드러난 바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SPD는 지배계급과 같은 편에 섰던 것이다. 1918년 11월에 혁명이 분출하자 SPD는 노동자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 좌경화해야만 했다. 그래서, 왕정을 구하려 애쓰던 SPD는 갑자기 공화국을 선포해야 했다. 그러나 SPD는 독일 전역을 휩쓸며 점차 성장하는 혁명적 소요가 자신의 진정한 적(敵)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을 무장시키지 않고 오히려 구질서의 군대인 자유군단(Freikorps)을 지원했다. 자유군단은 머지않아 좌파들을 상대로 일련의 살인 테러를 감행했다. 제1차세계대전 SPD와 혁명적 좌파 사이에는 독립사회민주당(USPD)이 있었다. 1917년에 SPD에서 분열해 나온 USPD도 말로는 좌파적 언사를 늘어놓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의회 내의 행동을 원했을 뿐이다. USPD 같은 정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고, 대중 투쟁의 시기에 수많은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그런 정당을 지지할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말을 믿을 것이고, 혁명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과 공유할 것이다. 하먼이 입증하듯이, 여기서 핵심 문제는 개량주의 정당들이 자신들을 배신했음을 노동자들이 깨달았을 때, 잘 조직되고 규율 있고 경험 많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노동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존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1918년 11월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3천 명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량주의·중도주의 단체들과 별개로 조직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혁명적 위기가 발생한 지 몇 주 뒤인 1918년 12월에야 독일공산당(KPD)이라는 독자 정당을 건설했다. 그래서 KPD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당원들은 응집력 있고 일관된 지도력을 제공할 수 없었다. 예컨대 1919년 1월에 KPD는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SPD의 도발에 때 이른 봉기로 대응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봉기가 실패하자 SPD는 자유군단이 활개치도록 내버려두었고, 자유군단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지도적 활동가들을 대거 살해했다. 그 뒤에도 5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먼은 그 때마다 계급 세력 저울을 설명하고 ‘주관적 조건’, 특히 당원 약 20만 명의 정당으로 성장한 KPD의 영향력과 전술을 분석한다. 오판 가장 흥미로운 것은 투쟁의 주요 고비마다 하먼이 KPD의 전술을 자세히 살펴보는 부분이다. 하먼은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검토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 옛 노동조합을 떠나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하는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행동을 요구하고 있을 때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비극적 대가를 치르게 되는가? 어떤 상황에서 공세로 나아가고, 어떤 상황에서 수세를 취해야 하는가? 의회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먼은 그런 전술적 결정들이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계급 전쟁은 한 가지 점에서 여느 전쟁과 마찬가지다. 즉, 특정 시점의 절대적 계급 세력 저울만이 전쟁의 결과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적군의 강점과 약점에 맞게 자신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도 결과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 한 순간의 오판(誤判) 때문에 승리의 문턱에서 혼란과 붕괴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독일 혁명에서 오판이 거듭된 이유는 흔히 KPD 지도부가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오버하다가 자신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러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떨어졌고,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로 가는 길이 닦였다. ≪패배한 혁명≫은 역사를 위한 역사책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역사책이다. 따라서 세계를 변혁하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이 책을 꼭 읽어 보기 바란다. 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 1997년 4월 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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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켄 영국의 계간 사회주의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자 크리스 하먼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알려면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크리스 하먼의 최신작 《좀비 자본주의》는 “현 위기가 자본주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공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알렉스 캘리니코스) 책이다. 한국에서도 조만간 번역·출판될 예정이다. 크리스 하먼은 현 세계경제 위기를 마르크스주의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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